20세기 영국 음악을 대표하는 작곡가 랠프 본 윌리엄스(Ralph Vaughan Williams)는 영국 전통 민요와 자연주의 정신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한 인물이다.
그의 연가곡집 《Songs of Travel》(여행의 노래들)은 삶을 하나의 여정으로 비유하며, 떠도는 삶 속에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이다.
그 중 첫 곡인 〈The Vagabond〉는 자유로운 영혼을 대변하는 방랑자의 선언으로, 시작부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본 글에서는 이 곡의 문학적 배경, 음악적 특징, 전체 가사와 해석을 통해 작품의 깊이를 함께 살펴본다.
방랑의 시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The Vagabond〉의 가사는 스코틀랜드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Robert Louis Stevenson)이 쓴 시집 《Songs of Travel and Other Verses》(1896)에 실려 있다.
그는 『보물섬』과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로 유명하지만, 시에서는 인간의 내면과 자연에 대한 애정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The Vagabond〉는 정착을 거부하고 자연과 함께 유영하는 한 인간의 태도를 통해, 물질과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 완결적 존재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나를 아는 친구조차 필요 없다”고 말하며, 오직 하늘과 땅, 길만 있으면 된다는 삶의 철학을 노래한다.
Vaughan Williams의 음악: 대지와 길의 리듬
1901년경 작곡된 이 곡은 빠른 4/4 박자와 무거운 저음의 피아노 반주로 시작된다.
반복되는 저음음형은 마치 떠도는 발걸음을 리듬으로 형상화한 듯하며, 강한 행진풍의 리듬은 방랑자의 당당함과 끈기를 표현한다.
성악 파트는 웅장한 남성적 음역에서 울려 퍼지며, 단순한 가곡이 아니라 혼잣말과 선언이 뒤섞인 한 편의 독백처럼 들린다.
이 곡은 영국 가곡 중에서도 특히 영웅적이고 강직한 성격이 강해, 리사이틀의 서곡처럼 사용되며 무대의 긴장을 단숨에 끌어올리는 힘을 지녔다.
삶은 길 위에 있다: 가사의 철학과 자유
〈The Vagabond〉는 현대인의 시선으로 보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품고 있다.
부, 사랑, 심지어 희망조차 원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화자의 목소리는 ‘자유’에 대한 절대적 가치와 그 대가로 감수하는 외로움을 함께 보여준다.
이 곡은 외로움을 회피하는 노래가 아니라, 고독을 삶의 일부로 수용하고 자유를 삶의 본질로 선택한 인간상을 그린다.
여기에 더해,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하는 본 윌리엄스의 미학이 곡 전체에 녹아 있어, 영국 음악 특유의 깊은 정서와 연결된다.
가사 원문과 한국어 번역
다음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원시와 한국어 번역이다. 시인의 내면 세계와 철학을 함께 음미해보자.
📜 영어 원문 (R.L. Stevenson – The Vagabond)
Give to me the life I love,
Let the lave go by me,
Give the jolly heaven above
And the byway nigh me.
Bed in the bush with stars to see,
Bread I dip in the river –
There’s the life for a man like me,
There’s the life forever.
Let the blow fall soon or late,
Let what will be o’er me;
Give the face of earth around
And the road before me.
Wealth I seek not, hope nor love,
Nor a friend to know me;
All I see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Or let autumn fall on me
Where afield I linger,
Silencing the bird on tree,
Biting the blue finger:
White as meal the frosty field –
Warm the fireside haven –
Not to autumn will I yield,
Not to winter even!
Let the blow fall soon or late,
Let what will be o’er me;
Give the face of earth around,
And the road before me.
Wealth I ask not, hope nor love,
Nor a friend to know me;
All I ask, the heaven above
And the road below me.
🇰🇷 한국어 번역 (의역 포함)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사랑하는 삶,
그 외의 것들은 그냥 내 곁을 스쳐가게 하라.
밝은 하늘이 머리 위에 있고,
작은 길이 내 옆에 있다면 충분하다.
별을 바라보며 덤불 속에 잠들고,
강물에 빵을 적셔 먹는 삶 –
그것이야말로 나 같은 이에게 어울리는 삶이며,
영원히 그러하리라.
고난이 빨리 오든 늦게 오든 상관없다.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나는 괜찮다.
내 주변엔 펼쳐진 대지가 있고,
앞에는 걸어갈 길이 있으니.
나는 부도, 희망도, 사랑도 바라지 않는다.
나를 아는 이조차 없어도 된다.
하늘과 그 아래 길만 있다면
그게 내가 원하는 전부다.
가을이 들판에 찾아와
나무 위 새를 잠재우고
손끝을 얼게 해도 –
서리 낀 들판이 희게 변하고
벽난로가 나를 유혹해도 –
나는 가을에도 굴복하지 않고,
겨울에도 마찬가지다.
고난이 오라, 빨리든 늦게든 좋다.
무엇이 오든 나는 나일 것이다.
대지가 내 주위에 있고
길이 내 앞에 있다면,
나는 부도, 사랑도 바라지 않는다.
나를 알아주는 친구도 필요 없다.
하늘과 그 아래 길,
그게 나의 삶이다.
고독하지만 자유로운 자의 찬가
〈The Vagabond〉는 단순한 방랑자가 아닌, 삶의 주도권을 신에게도 사회에도 맡기지 않는 자율적 인간상을 노래한다.
랠프 본 윌리엄스는 영국 민요의 전통과 시인의 철학을 결합해, 노래 한 곡 안에 자유, 자연, 고독, 그리고 인간의 존엄을 담아냈다.
이 곡은 무대 위에서보다, 오히려 청자의 마음속에서 더욱 크게 울린다.
길 위에서 혼자 걷고 있다는 사실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선택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노래, 그것이 바로 〈The Vagabond〉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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